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 진공 작전 (문단 편집) == 구한말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 == [include(틀:대한제국의 대외 전쟁 · 분쟁)] [[남대문 전투]] 이후 [[대한제국 군대 해산|해산]]된 [[대한제국군]] [[육군]] 군인들이 소지하고 있던 신식 무기와 탄약을 들고 전국 각지의 [[의병]]으로 편입되면서 [[정미의병]]은 이전의 [[을미의병]][* 다만 을미의병의 경우 해당 문서에서도 나와 있듯이 근대식 군사훈련의 이수와 함께 소총은 물론 암스트롱 야포까지 보유한 지방군(말만 구식군)이나 역시 적지 않은 조총과 구식 화포 및 서구식 총기를 보유한 민보군과 포군들을 주로 이루고 의병장들에게 포섭된 극소수의 청군 패잔병들도 있었기 때문에 정미의병 만큼은 아닐지 언정 화력과 전투력면에선 농기구만 들고 다녔다는 대중적인 이미지와 상반된다.]이나 [[을사의병]]과 비교하여 전투력이 대폭 향상됐다. 이에 고무된 전국의 의병장들은 경북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이인영(독립운동가)|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전국 8도의 의병장들에게 참가를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시|양주]]에 집결한다. 그 결과 [[허위(독립운동가)|허위]], [[민긍호]]와 같은 당대의 쟁쟁한 의병장들이 합류하여 10,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했다. 이 중에는 [[대한제국군]] 출신 병력이 무려 3,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문태수]], [[이강년]] 등이 합류할 예정이었다. 13도 창의군은 1908년 1월 서울에 주재 중인 각국 대사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합법적인 교전단체로 여겨줄 것, 즉 [[교전권]]을 인정해 줄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는 한편 [[허위(독립운동가)|허위]]가 이끄는 선발대 300명을 [[한양]] 밖 30리[* 당시엔 성저십리만 한양이라서 당시 한양에선 바깥이지만, 오늘날 서울특별시엔 들어 간다.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중랑구]] 일대. 정확히는 [[왕산로(서울)|왕산로]]부근이다, 참고로 왕산로 자체가 허위의 호에서 따와서 지은 도로이다.]까지 진격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일본 육군]]의 반격으로 인해 후퇴하고 만다. 여기에 [[이강년]], [[문태수]]의 의병부대가 일본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합류에 실패하면서 작전은 위기를 맞게 된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 총대장 [[이인영(독립운동가)|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고향 [[문경]]으로 낙향한다. 그냥 물러난게 아니라 이미 진공작전이 어렵게 되었다고 보고 의를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의병진에 돌려 서울진공작전을 중지시켰다. 작전을 매조지하고 수습하는 과정을 허위가 맡게 된것인데 고종의 밀지를 받은 이인영의 영향력은 13도 창의군을 결성할 때까지 유효했으나 창의군 결성 이후 관력이나 연배, 예하 병력에서 앞서는 허위, 민긍호 등이 합류하여 발언권이나 영향력이 크게 밀리던 상황이라 그의 귀향이 특별히 지장을 주진 않았다. 결국 서울에서 퇴각한 13도 창의군은 해산해 각자의 연고지로 돌아가 예전처럼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고, 특히나 [[황해도]]와 [[전라도]] 쪽에서 움직임이 활발했다. 물론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무장단체들이 자신들에게 위험하다고 판단한 일제는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저항하는 의병들을 거의 없애다시피 한다. 한편 이인영은 1909년 일본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